거미와 파리 아가씨와의 밀당
"파리 아가씨, 내 응접실로 모셔도 될까?"
멋진 정장을 차려 입은 거미 신사가 정중한 예의를 갖춰 파리 아가씨를 초대하는 걸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거미의 목소리는 마치 나긋나긋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가진 성우의 음성처럼 들립니다.
『거미와 파리』는 토니 디터리지가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고전적인 할리우드 공포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림은 검은색과 흰색 무채색만을 사용해 마치 흑백영화 한 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힐을 신은 파리 아가씨의 날씬하고 긴 다리와 하늘거리는 작은 날개에 비해 여덟 개나 되는 거미의 다리는 사다리처럼 기다랗고 검은 정장으로 가린 배는 불룩합니다.
거미의 눈빛은 어느 때는 음흉하고 느끼하고 게슴츠레하고 교활하게 번뜩입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깊고 어두운 동굴을 발견해 나가는것처럼 호기심이 커집니다.
그림과 함께 펼쳐지는 메리 호위트의 글은 거미와 파리가 서로 주고받는 불꽃같은 대사 때문에 더욱 흥미롭습니다.
포기할 줄 모르는 거미의 집념
온갖 수식어를 갖춘 화려하고 달콤한 말로 파리 아가씨를 유혹하려는 거미의 대사는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메리 호위트의 아름다운 시는 검은 바탕위에 펼쳐진 회색 거미줄위에 흑백영화 속 자막처럼 흑과 백의 대비를 이루며 펼쳐집니다.
처음에 거미는 파리에게 자기의 응접실은 작고 예쁘며 보여줄 재미난 것들이 아주 많다고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포장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갖가지 배경을 늘어놓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똑똑한 파리는 단박에 거절합니다.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층계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온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요?" 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이미 거미의 정체에 대해서도 다 아는 듯이 말합니다.
거미는 다시 파리한테 멋진 침대와 이불 자랑을 하고 자신의 침대에서 쉬어가라고 말합니다.
똑똑한 파리 아가씨가 넘어갈 리 없습니다. 이쯤 되면 읽는 이는 파리가 거미한테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교활한 거미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시도를 합니다.
사랑 고백을 하고 더불어 명품 요리까지 선사하며 파리 아가씨의 마음을 사려고 합니다.
영리한 파리 아가씨는 이번에도 멋지게 한방 날리며 거절합니다. 그러나 거미의 들이댐은 끝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파리 아가씨의 예쁜 외모를 칭찬합니다. 칭찬 앞에서 웃지 않을 이 있을까요?
파리 아가씨 이쯤 되면 넘어올 법도 합니다. 또한 그렇게 자신을 위해 사랑과 선물과 칭송을 아끼지 않는 거미의 정성 앞에서 의심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듯합니다. 파리는 고맙다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거미한테 이별을 고합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는 거미의 근성 앞에서 우리의 똑똑한 파리 아가씨도 무릎을 꿇고 맙니다.
거미의 먹잇감이 되고 만 파리 아가씨
파리를 차지하기 위한 거미의 노력은 치밀하고 끈질기고 집요합니다.
그 정성과 노력이 가상합니다. 사업가라면 틀림없이 대박이 났을 겁니다.
하지만 거미 스스로한테는 대박이었을지 몰라도 잘못된 성공이 되고 말았습니다.
까닭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그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거미의 파리를 향한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파리는 똑똑했지만 세상 물정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나름대로 똑똑하다고 자부했겠지만, 천진한 구석이 있었던 겁니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파리가 정말로 똑똑했다면 거미를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합니다.
아예 눈길조차 주지 말고 발길조차 끊어야 했습니다.
파리는 자신의 귀를 간질이는 달콤한 칭찬이 듣기 좋은 노래를 듣는 것 마냥 싫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거짓과 가짜를 만납니다. 거짓이 진실을 이기기도 하고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거짓 앞에서 진짜는 빛을 잃기도 합니다.
거미와 파리를 보면서 가끔씩 뉴스에 오르내리는 어린이 성폭력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연약하고 순진한 어린아이를 유인하여 추악한 욕망의 먹잇감으로 삼는 더러운 인간의 모습과 철저하고 교묘한 사기꾼 거미의 모습이 겹쳐지는 건 왜일까요? 어린이 여러분 세상은 거미 같은 사람이 너무도 많습니다.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상큼 발랄하게 웃으면서 달콤한 말로 어린이들의 귀를 간질입니다.
그들이 좋다고 멋지다고 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진짜 속내를 들여다볼 줄 아는 지혜의 눈을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장에 어린이들에게 주는 거미의 충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디 우리 어린이 여러분이 거미 같은 사기꾼과 아첨꾼의 장난에 넘어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더불어 사악한 아첨꾼의 말에 속아 안타깝게 하늘나라로 간 파리 아가씨의 명복을 빔니다.
▶그림책 : 『거미와 파리』
▶ 출판사 : 열린어린이
▶ 글 : 메리 호위트
▶ 그림 : 토니 디터리지
▶ 옮긴 이 : 장경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