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쉼터, 시간 상자
세상 모든 것은 소멸의 운명을 갖고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은 언젠가는 사라질 먼지 같은 것이다.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사라지며 첫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무엇도 없다. 어제의 태양과 오늘의 태양은 같은 모습이지만 시간 속에 존재했던 모습은 같은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 사람도 사랑도 예술도 종교도 추억도 이 모든 것들은 시간 속에서 다만 흘러갈 뿐이다. 사람도 만물도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역사적인 것들 이를테면, 인류사부터 개인사까지 책으로 그림으로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아니던가 이집트 피라미드의 미라도 몇백 년 된 바위 벽 속 부처님도 동굴 벽 속의 그림들도 모두가 흘러가는 현재를 붙잡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책 속의 시간 상자는 사진기이다. 사진기는 흘러가는 현재를 붙잡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시간 상자에서 한 소녀는 바닷가에서 신기한 수중 사진기를 발견한다. 바닷속에서 오랜 시간을 배회했는지 사진기 곳곳에 따개비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소녀는 사진기 안에 필름을 꺼내 인화하는데 사진 속에는 이상하고 기묘한 바다 풍경이 펼쳐져 있다.
뱃속에 도로래가 있고 태엽이 감기고 프로펠러 같은 날개가 달린 로봇 물고기가 수영을 하고 있고 사람의 가정집 거실 같은 곳에서 문어는 책을 읽고 있고 어떤 물고기는 스탠드가 되어 환한 빛을 반사하고 있다. 공처럼 생긴 복어가 애드벌론이 되어 물고기를 태우고 날아다니고 있고 거북이 등 위에는 소라로 된 집으로 만든 도시가 있는데, 그 도시를 지고 거북이는 바다 속을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다.
글자 없는 그림, 수중 사진기
비행접시처럼 생긴 우주선도 있고 여러 명의 우주인들이 바닷속을 관찰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책 속에서 가장 궁금증을 자아내는 사진은 눈도 작고 코도 동글납작한 동양 아이인 듯한 여자아이가 어떤 소년의 사진을 들고 미소 짓고 있는 사진인데 여자아이가 들고 있는 사진 속 소년도 다른 소녀의 사진을 들고 있고 사진 속 소녀도 또 한 다른 소년의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 속에 또 다른 사진 또한 다른 사진 속에 또 다른 사진이 있다. 소년은 사진 속에 들어있는 여러 아이들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데 10배속 25배속 40배속 55배속 70배속으로 관찰해 제일 처음 처음 이 사진을 찍은 아이까지 보게 된다.
현미경의 숫자를 가리키는 몇몇 배속은 100년 전 250년 전 같이 거슬러 올라간 과거를 나타내는 것 같다 사진 속 사진에는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흑백 사진까지 있다.
소년은 현미경을 통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사진 속 과거의 아이들까지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소년도 여자아이의 사진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찍는다.
그리고 사진기를 바닷속으로 던져버린다. 수중 사진기는 이제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여행길에 접어들고 문어와 인어와 새와 파도를 만나고 한 소녀를 만난다 이 모든 이야기는 모두 글자 없이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상상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그가 끌어들인 세계는 기이하고 비현실적이지만 그림 속으로 푹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의 그림은 미켈란젤로 다빈치 뒤러 같은 마그리트 달리 등 초현실주의 미술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책 표지에 사진기가 비치고 있는 동그란 물고기 눈은 마치 사진기의 렌즈처럼 보인다. 바닷가의 소년은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사진 속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고 독자 또한 머나먼 과거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게 된다. 소녀는 사진 속 소녀와 말 한마디 나눈 적 없지만,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현실에 환생한 것처럼 생생하다 불교에서는 모든 만물이 순환되는 윤회가 있다고 말한다.
꿈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시간 상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처럼 소녀는 몇십 년 전 아니 몇백 년 전에 태어나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존재인데 과거 속 소년은 사진 속에 재현되어 현재의 소년 소년은 또 현재를 지나 미래의 누군가 앞에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은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느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뿐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현세에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인연이다. 그러니 내 곁에 살아 숨 쉬고 있는 가족과 친구들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크나큰 복인가 아이들은 호기심 덩어리이다.
그러기에 아이 눈에 비친 세상은 경이롭고 환상에 차 있으며 속에서 아이들은 꿈을 꾸고 놀며 자란다 마지막 부분에서 수중 사진기는 또 다른 아이 손에 들어가지만 사진기는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새로운 아이를 찾아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진 속 아이들의 옷이며 피부색 머리카락 색깔 생김새 따위가 각각 다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위즈너는 시간상자라는 상상의 세계를 통하여 우리들을 꿈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아이들은 기꺼이 시간 상자 속 꿈과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모든 소멸하는 것들은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긴다 그 아름다운 뒷모습을 시간 상자 속에 넣어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디지털카메라와 휴대폰 속에 아름다운 순간을 담아두고 가끔씩 꺼내보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의 삶은 환상의 세계에 비추어 본다면 너무 복잡하고 어지럽다 시간상자는 그런 현실세계의 쉼터고 아름다운 틈새다 가끔씩 현실을 놓아버리고 땅 하늘 어디로든 꺼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한 꿈과 환상의 세계마저 상상하지 못하고 느낄 수 없다면 우리 삶은 너무 쓸쓸하지 않은가 당신의 아름다운 쉼터에 푸른 틈새에 새 한 마리 날고 있다.
▶그림책 : 시간상자
▶ 출판사 : 배틀북
▶ 글 : 데이비드 위즈너
▶ 그림 : 데이비드 위즈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