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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 받은 길

by 천년 느티나무 2024. 2. 26.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아슴아슴 스며드는 가랑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서걱서걱 소리 내며 바람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아롱아롱 번지는 안개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

아악아악 소리치며 장대비가 내린다.

 

중학교3학년 여름, 며칠째 강렬한 햇볕만 쏟아져 운동장엔 마른 흙먼지만 풀풀 날렸다.

나는 찜통 같은 교실에서 땀을 귀밑머리까지 흘리며 희멀끔한 운동장을 시리게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하늘이 거뭇해지며 우르릉 콰광 천둥치더니 어른 손가락만한 장대비가 와악,와아악 쏟아져 내렸다.

마른 먼지 풀풀 날리며 희멀끔했던 운동장은 물로 장관을 이루며 도랑이 생기고 물웅덩이까지 만들어졌다.

그때 나는 운동장으로 뛰어들고 싶었다.비속에서 하얀 광목옷을 입고 너울너울 춤추고 싶었다.

한 마리 학이 되고 싶었다.가슴은 마구 뛰었고 나의 눈은 빛났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의 내 몸과 마음은 땅과 물과 하나가 되고 싶었던,

바로 자연과 일체되고 싶었던 무아의 순간이었다.

비 오는 날 마루에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손바닥에 받으면 자디잘은 수 십 개의 물방울이 구슬처럼 번졌다.

무서운 독(毒)비가 내린다.

 

일본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 된 지금이라면 어떨까.

독뱀 같은 방사능이 온 세계 바다를 흘러 다닌다.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내가 사랑했던 맑은 비에 섞여 내린다.

사람들은 살갗에 닿을까 우비를 뒤집어쓰고 그 위에 또 우산을 겹쳐 쓰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리고 비를 맞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걷는다.

아슴아슴 가랑비, 서걱서걱 바람비, 아롱아롱 안개비가 아니고 무서운 독()비가 내린다.

 

비가 오면이란 그림책을 보면 마음이 밝고 맑아진다.

밝고 경쾌한 색감 때문에 눈은 즐겁고 가슴에 환한 달덩이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환해진다.

빨강 노랑 파랑의 선명한 밝은 색의 그림이 비오는 날의 풍경을 밝고 경쾌하게 나타내주고 있다.

예기치 않은 비오는 날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어린 자식을 위해 식구들은 우산 하나 둘 챙겨 학교로 가고 집에 갈 일을 걱정하던 아이들은 식구들의 비 마중에 웃음꽃이 핀다.

비가 오면 나는 기다렸다.우산을 가지고 내게로 오시는 엄마나 아버지를.

비 오는 날 아쉽게 한 번도 와주지 않으셨지만 그때의 기다림과 설렘이 아직도 비속에 차오른다.

식구들이 비 마중을 나오지 않아 우산이 없었던 아이들은 운 좋게 선생님께 라면을 얻어먹는다.

라면을 먹는 동안 비는 조금 그치고 아이들은 가락가락 내리는 비를 막으려 오동나무잎을 우산 삼아 머리에 쓰고 간다.

그 모습은 이제 먼 옛날 흑백사진 속 이야기.

 

걷고 싶지 않은 길

 

호박넝쿨 우거지던 시골길은 검은 아스팔트로 뒤덮여 이제 더 이상 걸 을 수 없는 무서운 길이 되었다.

화물차가 덤프가 버스가 질주하며 도로에 고인 물을 얼굴에 온몸에 빗물을 퍼붓는 기분 더러워지는 길이 되었다.

비오는 날이면 더더욱 걷고 싶지 않은 길, 슬픈 길.

맑은 날에도 흙먼지 뒤집어쓰며 걸어야 하는 가슴 아픈 길이 되어 버렸다.

회색빛 창공에서 말라비틀어진 빵 냄새가 난다

날개 부러져 죽은 새의 겨드랑이 냄새가 난다.

내달리는 차창 밖으로 유령 같은 얼굴을 한 허연 휴지 조각이 날린다.

타다만 담배꽁초도 여럿 차창 밖으로 내던져진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 고속도로 주변 덤불을 청소하면 담배꽁초와 잡쓰레기들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달리면서 차창 밖으로 무심코 던지는 병과 꽁초와 휴지나부랭이들이 이토록 우리 땅을 무지막지하게 더럽히고 있다.

새끼손가락 반 토막만한 꽁초가 수 천,수 만개 우리 강물과 바다 속을 떠다닌다.

젖은 날개를 하고 허리가 꺾인 채 민들레꽃 낯짝 위로 애기똥풀 종아리 아래로 망초꽃 발가락 사이로 꽂혀 있다.

논바닥을 파다보면 밭둑을 매다보면 반짝이며 길거리를 떠돌던 은종이들이 쑥대머리가 되어 팔다리가 꺾여 접혀있다.

커피 캔과 부탄가스통도 녹슬어 죽은 듯 누워있다.

이러다가 미쳐가지, 이러다가 다 녹아버리고 말지,사람도 나무도 새도 하늘도 땅도.’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우리가 바라는 건 무언가.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리고 있을까

.이 거대한 자본이 만든 쓰레기들은 결국 저주가 되고 말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더러워진 지구를 떠나 또 다른 별을 찾아 떠나길 꿈꾸지만 이미 그곳은 엄마 품속이 아닐 테다.

우리는 황량하기만 한 다른 별에서 외로워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흐느껴 울 것이다.소리치고 싶다.

이제 그만 여기서 멈추라고,기계의 펄럭이는 날갯짓과 허리 굵은 굴뚝의 허우적거림을.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낸 저 반짝임과 깨끗함, 단단함으로 대지는 숨통이 막히고 풀과 나무들은 그만 길을 잃었다.

그네들은 콘크리트 속에 갇혀 독기를 품은 채 언젠가 대기 밖으로 터져 나올 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구가 온통 쓰레기로 뒤덮여가고 있다.

일본 도쿄의 겨울,화단에 버려진 깡통과 타이어 바닥 속에는 무당벌레가 산다.

두꺼비는 더 이상 봄잠을 자지 않는다.

비 오는 날 마른 흙바닥에 내리 꽂히듯 떨어지는 비속에서 너울너울 탈춤을 추고 싶던 소녀의 눈 속에 물기가 가득하다.

꺼먼 하늘 사이로 말끔한 한 덩이 구름이 고개를 쑥 내민다.

 

 

<책정보>

*책 제목:비가 오면

*출판사:사계절
*:신혜은

*그림:최석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