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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노릇노릇 구워지다

by 천년 느티나무 2024. 2. 27.

달콤한 평화

배고픈 여우 한 마리가 있었어. 여우이름은 콘라트야. 콘라트는 늘 배가 고팠어.꼬르륵 소리를 달고 다녔지. 배고픈 콘라트는 한 마리 알을 품은 엄마 오리를 엿보고 있었지. 오리와 친구가 되려고 한 건데 엄마 오리는 알을 버리고 도망가 버리지.집으로 가져와 맛있는 오리 요리를 해먹으려고 하는데 귀여운 아기오리가 태어나고 말지. 새들은 제일 처음 보게 된 존재를 자기 엄마로 안대. 아기오리가 처음본 건 중년의 배고픈 여우 한 마리. 엄마,엄마하며 종종거리며 따라오는 오리를 콘라트는 차마 잡아먹을 수 없었지. 어쩔 수 없이 아빠가 되어 버린 중년의 여우는 아기 오리를 먹이고 입히고 어엿한 청년 오리로 키워냈어. 청년 오리한테는 예쁜 여자 친구가 생겼지. 콘라트는 할아버지가 된 거야. 많은 손자 손녀들을 거느리게 된 콘라트는 오리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잠들지. 손자 손녀 오리들은 할아버지가 잠든 숲에서 뛰고 놀고 웃고 울고 먹고 자고 평화롭게 살아가지.

여우 한 마리와 아기 오리가 만든 평화

입말로 술술 풀리는 개성 넘치는 여우 콘라트 이야기는 초등학생이 색연필로 스케치한 것 같은 바탕에 크레파스로 설렁설렁 색칠한 것 같은 아주 편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책입니다.

늘 배가 고픈 여우의 표정은 동정심이 갈 정도로 불쌍해 보이고 여우 앞에서 철없이 재롱떠는 아기 오리는 너무 귀여워서 콕 깨물어 주고 싶을 지경입니다.

늘 배고픈 콘라트에게 아기 오리는 참을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지만 차마 자기 배를 채우지 못합니다.

나중에 크면 자기 배를 든든하게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오리가 청년 오리가 되었을 때 이미 둘은 끈끈한 부자 사이가 된 것입니다.

콘라트는 오리를 잡아먹을 정도의 나쁜 인격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렇게 생겨 먹지도 않았던것입니다.그래서 엄마 오리가 알을 품고 있을 때 얼마든지 잡아먹을 수 있었지만 잡아먹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엄마 오리와 친구가 되려고 다가갔지만 엄마 오리는 겁을 먹고 자기 새끼마저 버리고 도망 가버린것입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졸지에 아버지가 되어버린 중년의 배고픈 여우는 참으로 정이 가는 인물입니다.

콘라트를 사람에 빗댄다면 그는 많은 사람을 품을 줄 아는 넉넉한 가슴과 넘치는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은 오리가족이 대대로 풍요로운 가계를 이루어 번창하며 살아가는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콘라트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아버지로서의 삶으로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콘라트 자신도 가정을 꾸리고 친구를 만나고 술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녔다면 동정심이 좀 덜 갔을 것입니다.

콘라트는 아버지로서 충실했으나 사회인으로서의 위치는 약했습니다. 콘라트가 좀 더 자기 욕망에 충실했다면 더 행복했을 것입니다. 늘 배고픔에 시달리고 배고픔을 견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겨낼 방법을 찾아냈다면 좋았을것입니다.

콘라트의 꾸르륵거림은 배고픔 이전에 삶의 덧없음과 살면서 겪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설움 같은 것입니다.

세월은 흘렀고 콘라트는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늙어갔습니다. 콘라트는 오리가족들이 노니는 아름다운 숲에 묻혔고 그 옆엔 푸른 호수가 있습니다. 숲과 물의 경계에 묻힌 콘라트는 죽어서도 피가 섞이지 않은 오리 가족을 돌볼 것입니다.

콘라트가 묻힌 그 숲과 오리가족이 노는 호수는 참 평화로워 보입니다. 오리가 물에서 실컷 자맥질을 하고 따듯한 언덕에서 젖은 깃털을 말리는 모습은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살아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진짜 평화

평화는 다름 아닌 그런 것입니다. 오리가 자맥질하고 난후 따듯한 언덕을 만나는 것, 콘라트가 배고프고 외로울 때 아기 오리와 만난 것,아들오리가 사랑에 빠져 외로울 때 손자 오리를 만난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 평화가 찾아오는 것입니. 오리 가족이 번성해 수많은 아기 오리들 사이에 둘러싸인 그때 말입니다. 혼자 조용히 눈감고 있을 때를 평화라고 생각하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평화는 깨지고 외로움의 상태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대화하고 먹고 마시고 소통할 때 평화는 싹틉니다. 항상 배우고 꿈을 향해 뛰어갈 때 변화에 뒤따라갈 준비가 되었을 때 평화는 뒤따라옵니다. 사람들은 보통 전쟁이 없는 평온한 상태를 평화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싸우지 않고 살아가기는 정말 힘듭니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서 늘 부딪치고 문제와 맞서게 됩니다.

그러기에 내가 스스로 단단해지지 않으면 평화를 얻기는 힘든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많은 압력과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배고픔들을 견디지 않으면 평화는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싸움을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문제를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 되는 건 더욱 아닙니다. 똥이 더럽다고 똥을 피한다고 내 집이 깨끗해지는 건 아닙니다.

콘라트가 평생 느꼈던 꾸르륵거림, 배고픔, 나는 이걸 꿈꾸는 욕망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랑을 향한 닿을 수 없는 그리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이상과 현실 사이, 몸과 마음 사이의 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하면 흰색 비둘기를 떠올리지만 흰색은 어느 색과도 섞일 준비가 되어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진 색입니다.

그러기에 평화는 딱딱한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새싹입니다 .설레는 희망을 품고 뛰어오를 준비를 하는 노란 풍선입니다.

소란스럽던 하루를 보내고 갑옷 같은 외피를 벗어 껍질 같은 몸의 먼지를 떨어내고 따뜻한 이부자리에 누웠을 때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그것은 하루를 고단하게 뛰어온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아주 부드러운 값진 평화입니다.

하루를 해됨도 상함도 없이 지내고 온기로 가득한 몸과 맘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눈 감으면 저 깊은 곳으로 부터 소리가 들려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볕 좋은 날 두 눈을 감고 볕 속에 마주앉아 눈을 감아보시기 바랍니다.

따사로움 속에 노곤한 잠이 달콤한 평화가 노릇노릇 구워지는 냄새가 납니다.

살아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달콤한 평화입니다!

 

<책정보>

책제목:배고픈 여우 콘라트

출판사:하늘파란상상

:크리스티안 두다

그림:율리아 프리제

옮긴이:지영은